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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의 동침’ 불사 재계 新동맹 시대
2020-07-03 09:36:43 

지난 6월 22일 충북 청주 LG화학 오창공장. 재계를 대표하는 그룹 총수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과 구광모 LG그룹 회장이 전격 회동을 가졌다. 두 사람이 사업을 목적으로 공식 회동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 수석부회장과 구 회장이 만난 것은 전기차 배터리 협력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LG화학은 정 수석부회장을 비롯한 현대차그룹 경영진에게 빅데이터, 인공지능(AI)으로 배터리 성능을 강화하는 시스템 등 기술 개발 현황을 설명했다.
현대차그룹 경영진은 LG화학이 개발 중인 장수명 배터리(기존 배터리보다 수명이 5배 긴 배터리), 리튬황 배터리(리튬이온 배터리보다 에너지 밀도가 2배 높은 배터리) 등 미래 배터리 기술 방향성을 듣고 협력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5월에도 정 수석부회장은 삼성SDI 천안사업장을 찾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전고체 배터리(액체 전해질을 고체 전해질로 바꿔 성능을 높인 배터리) 협력 방안을 공유했다. 조만간 최태원 SK그룹 회장과도 만나 SK이노베이션과 협업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다. 전기차 배터리 시장 공략을 위해 국내 4대 그룹 총수가 잇따라 동맹을 맺으면서 ‘K-배터리 드림팀’이 탄생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불확실한 경영 환경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는 기업은 상대방을 적으로 인식할 뿐, 동맹을 맺는 사례가 많지 않았다. 동맹은커녕 경영활동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면 법적 소송전을 벌이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달라졌다. 4차 산업혁명 시대 첨단기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과감히 경계를 허물고 적과 동침하는 사례가 부쩍 늘었다. 단순한 협력관계를 넘어 지분 맞교환을 통해 ‘혈맹’을 맺는 사례도 적잖다. 기업 동맹 사례를 유형별로 들여다봤다.



▶기업 동맹 사례 들여다보니

▷로봇·AI 등 신기술 제휴 ‘선택과 집중’

첫째,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로봇, 인공지능, 전기차 배터리 등 신기술 분야 시너지 효과를 위해 손잡는 경우가 많다.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삼성, SK, LG그룹과 잇따라 협력하는 것은 전기차 시장 공략에 힘을 싣기 위해서다. 현대·기아차는 2011년 첫 순수 전기차를 선보인 이래 지금까지 국내외 시장에서 27만여대를 판매했다. 글로벌 전기차 전문매체 EV세일즈에 따르면 현대·기아차는 올 1분기 순수 전기차 2만4116대를 판매해 테슬라, 르노-닛산얼라이언스, 폭스바겐그룹에 이어 4위에 올랐다.

‘2030년 글로벌 신차 중 절반이 전기차’라는 전망이 나올 정도로 전기차 시장이 급성장하는 만큼 현대차는 전기차 시장 공략에 드라이브를 거는 중이다. 올해 울산공장에 전기차 전용 생산라인을 구축하고 내년에는 전기차 전용 플랫폼 기반의 전기차를 내놓을 예정이다. 2025년까지 총 44종의 친환경차를 선보일 예정인데 이 중 절반이 넘는 23종이 순수 전기차다.

전기차 경쟁력을 높이려면 우수한 품질의 배터리는 필수다. 배터리는 전기차 단가의 최대 40%를 차지할 정도로 핵심 부품이다. 전기차 배터리는 납품 2~3년 전에 계약을 진행하는 선주문 방식인데 신차 개발 단계부터 주요 모델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배터리’가 있어야 성능이 높아진다. 완성차 업체와 배터리사 간 협업이 더욱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LG화학, 삼성SDI, SK이노베이션 등 배터리 업체 입장에서도 글로벌 상위권 전기차 업체 현대·기아차와 손잡으면 안정적인 공급처를 확보하는 효과가 있다. 재계 관계자는 “배터리사 입장에서는 전기차 시장 큰손 현대차그룹과 손잡으면 ‘규모의 경제’ 효과를 노릴 수 있다. 현대차로서도 세계 최고 수준의 배터리를 공동 개발·생산해 전기차 품질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만큼 윈윈”이라고 분석했다.

로봇사업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손잡은 곳도 많다.

LG전자는 로봇사업에 힘을 싣기 위해 CEO 직속기구로 ‘로봇사업센터’를 신설했다. 네이버 연구개발 자회사인 네이버랩스와 협력해 LG전자가 개발하는 다양한 로봇에 네이버의 xDM을 적용하는 로봇 관련 연구개발을 진행해왔다. xDM은 네이버가 자체 개발한 고정밀 위치 이동 통합기술 플랫폼이다. LG전자는 AI, 자율주행 등 핵심 기술을 네이버의 강점인 소프트웨어 플랫폼과 융합해 차별화된 로봇을 개발할 계획이다. 가정용 로봇, 안내 로봇, 청소 로봇, 웨어러블 로봇 등 다양한 분야에서 로봇사업을 추진 중이다.

둘째, 기업 간 지분 맞교환을 통해 ‘혈맹’을 맺는 사례도 등장했다.

SK텔레콤과 카카오는 전략적 제휴를 맺고 3000억원 규모의 지분 맞교환을 단행했다. 이를 통해 SK텔레콤은 카카오 지분 2.5%를, 카카오는 SK텔레콤 지분 1.6%를 보유하게 된다. 필요에 따라 1~2가지 사업에서만 협력하는 것을 뛰어넘어 피 같은(?) 지분까지 서로 나눴다는 의미다.

원래 두 회사는 앙숙관계였다. 국민 메신저 카카오톡이 등장하면서 국내 1위 이동통신사 SK텔레콤의 문자 메시지 매출은 급락했다. 가뜩이나 통신사 간 경쟁이 치열해 수익이 떨어지던 상황에서 카카오 등장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앙숙이었던 이들이 자존심을 접고 혈맹을 맺은 것은 글로벌 플랫폼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규모의 경제’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협력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절박함이 국내 IT 대표 기업 2곳을 한배에 타게 만들었다는 평가다. 일례로 카카오가 웹툰, 웹소설을 영화 콘텐츠로 만들면 SK텔레콤이 보유한 플랫폼에 공급되는 식이다. 카카오 콘텐츠가 토종 OTT 웨이브에 올라와 해외 시장에서 인기를 끌면 얼마든지 시너지 효과가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최근에는 카카오톡 플랫폼을 활용해 소비자가 휴대전화를 직접 구매할 수 있는 비대면 판매 서비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안재민 NH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국내 1위 무선통신 사업자 SK텔레콤의 3124만명 가입자와 카카오의 4417만명 MAU(월간순이용자수) 트래픽이 합쳐지면 AI, 모빌리티, 자율주행 등 중장기 신사업에서 다양한 협력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통신사와 제조업체 간 지분투자 사례도 적잖다.

KT는 최근 현대로보틱스에 500억원 규모의 지분투자와 함께 지능형 로봇, 제조업 디지털 혁신 사업에 협력하는 내용의 협정을 체결했다. 이를 통해 KT는 현대로보틱스 지분 10%를 확보하게 됐다. 현대로보틱스는 국내 산업용 로봇 시장점유율 1위 기업으로 2017년 현대중공업지주의 로봇사업부로 설립돼 올 5월 별도법인으로 분사했다. 현대중공업그룹의 미래 먹거리 핵심 사업으로 손꼽힌다.

KT는 지난해 10월 “통신사에서 AI 컴퍼니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한 이후 현대중공업그룹과 긴밀하게 협력해왔다. 올 들어 현대로보틱스와 합작한 2세대 기가지니 호텔 로봇 ‘앤봇(N bot)’을 노보텔앰배서더서울동대문호텔&레지던스에 선보였다. 이번 지분투자를 계기로 두 회사는 지능형 서비스 로봇 개발, 자율주행기술 등의 사업 기회를 발굴하기로 했다. KT는 지능형 로봇과 자율주행기술에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현대로보틱스는 하드웨어 제작을 맡아 서빙 로봇, 청소 보안 로봇 등을 공동 개발한다. 특히 이번 투자는 5G 기술로 산업계 디지털 혁신을 지원하는 한편 B2B(기업 간 거래) 시장에서 활로를 찾아야 한다는 구현모 KT 사장 의지가 적극 반영됐다는 후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신성장동력이 마땅치 않은 통신사 입장에서는 AI, 디지털 전환 시장이 블루오션으로 떠오르는 분위기라 현대중공업과 전격 협력관계를 맺은 듯 보인다. 조선업 부진에 시달리는 현대중공업도 신성장동력인 로봇사업을 키우는 데 KT와의 제휴가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셋째, 코로나19 여파로 불황이 짙어지면서 ‘선택과 집중’을 위해 동맹을 맺는 경우도 적잖다.

석유화학업계에서는 롯데케미칼과 한화종합화학이 합성섬유와 페트병의 중간 원료인 PTA(고순도 테레프탈산) 공급 관련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오는 7월부터 롯데케미칼이 한화종합화학으로부터 연간 45만t 규모의 PTA 제품을 공급받는다는 내용이다.

두 회사가 손잡은 것은 ‘선택과 집중’을 통해 핵심 사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다. 롯데케미칼은 7월부터 울산공장 내 연산 60만t의 PTA 공장 가동을 중단한다. 대신 PIA(고순도 이소프탈산) 설비 전환에 나서기로 했다. 페트병, 도료 등의 원료로 사용되는 PIA는 고부가가치 화학제품으로 롯데케미칼은 PIA 세계 시장점유율 1위(연간 생산량 52만t)를 굳힌다는 방침이다. 연산 200만t 규모의 국내 최대 PTA 생산시설을 보유한 한화종합화학은 안정적인 수급처를 확보해 사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게 됐다.

글로벌 시장 성과를 내기 위해 힘을 합친 경우도 있다. 금융지주 맞수인 신한금융그룹과 하나금융그룹이 대표 사례다.

신한금융과 하나금융은 지난 5월 말 그룹 간 경쟁력 강화를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글로벌 사업 부문 제휴를 추진하기로 했다. 코로나19 악재에 초저금리 시대가 도래한 데다 카카오, 네이버 등 ‘테크핀(IT 기반의 금융 서비스)’의 금융권 도전이 거세지면서 양측이 자존심을 접고 동맹을 맺었다는 분석이다. 신한은행은 최근 하나은행과 10억달러 규모의 아프리카 수출입은행 신디케이트론(은행 2곳 이상이 해외 기업에 공동으로 자금을 대출하는 업무)에 참여하는 금융약정을 체결했다.

온라인 쇼핑 시장에서 경쟁하는 11번가, 이마트몰처럼 아예 상대방 플랫폼을 활용하는 경우도 등장했다.

11번가는 지난 4월 말부터 ‘오늘장보기’ 전문관에서 이마트몰의 신선가공식품과 생필품, 가전, 패션 등 3만5000여개 상품을 판매했다. 이마트몰이 오픈마켓에 입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마트몰 입장에서는 11번가 방문자를 새 고객으로 끌어들이고 11번가는 부족한 식품 부문을 강화하기 위해 ‘적과의 동침’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적과의 동침’ 사례 왜 늘어나나

▷재계 3~4세 명분보다 실용성 중시

기업마다 자존심을 버리고 ‘적과의 동침’에 나서는 건 치열한 경쟁을 뚫고 수익을 높이려는 목적이 크다. 스스로 부족한 분야를 보완하거나 신규 사업에서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서다. 후발주자 입장에서는 신기술 개발과 시장 선점을 위해 경쟁사와의 협력이 절실할 수밖에 없다. 재계 관계자는 “오너 3~4세 기업인이 경영 전면에 나서면서 명분보다 실용성에 중점을 두는 분위기다. 국내외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해온 재계 4대 그룹 총수가 잇따라 손을 잡는 것은 그만큼 실리가 중요하다는 걸 증명하는 사례”라고 귀띔했다.

지금까지는 주로 대기업 간 동맹을 맺는 경우가 많았지만 앞으로는 대기업과 우량 기술을 갖춘 중소기업 간 협력 사례가 점차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최윤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대기업이 마스크를 생산하는 중소기업에 대한 기술 지원을 한 것처럼 중소기업 혁신 역량을 높여 대기업과 협력하는 사례가 많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물론 경쟁사와의 협력이 반드시 긍정적 효과를 낼지는 의문이다.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기대만큼 성과를 내면 좋지만, 반대로 손실이 커질 경우 책임 소지를 떠넘기는 데 급급할 우려도 크다. 현대차가 전기차 배터리 사업 협력을 위해 삼성, SK, LG와 손잡기로 했지만 제휴 과정에서 배터리 3사 간 견제가 심할 경우 협력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다. 현대차가 일부 업체 배터리 사용 비율을 늘리면 다른 업체가 반발해 갈등을 빚을 수 있다는 의미다. 특히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를 두고 소송전을 벌이는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어떤 식으로든 견제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시장 여건에 따라 현대차그룹이 배터리 업체와의 동맹을 깨고 자체 배터리 생산에 돌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국가 간 경계도 의미 없다. LG화학은 미국 자동차 1위 업체 GM과 합작사를 설립했다. 두 회사는 각각 1조원을 투자해 지난해 말 미국 오하이오주에 배터리 합작법인을 세우고 차세대 배터리를 개발해왔다. 만약 GM과의 합작사가 성과를 내는 것이 현대차와의 협력보다 유리하다면 LG화학은 언제든 현대차와의 협력관계를 끊을 수 있다. 애플도 무려 15년간 이어왔던 인텔과의 동맹관계를 끝내고 최근 개인용 컴퓨터 맥 시리즈에 자체 개발한 칩 ‘애플 실리콘’을 사용하기로 했다.

지분 맞교환도 마찬가지다.
SK텔레콤과 카카오처럼 지분 맞교환 사례가 늘고 있지만 향후 사업이 어려워지면 지분 정리를 두고 각종 분쟁에 휘말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기업 경영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기 때문이다. 김경원 세종대 경영전문대학원장은 “기업 간 협력관계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한쪽만의 희생, 상대방보다 더 큰 이익만 고집하면 얼마 못 가 제휴가 깨질 우려가 크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업 간 동맹은 국가 경제 측면에서도 긍정적 효과를 내는 만큼 초심을 유지하면서 오랜 기간 협력관계를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경민 기자 kmkim@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65호 (2020.07.01~07.0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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