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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이 만난 사람] 이헌재 여시재 이사장·前 경제부총리
2018-06-26 17:52:03 

6·13 지방선거 이후 다들 보수의 궤멸을 말한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 듯 국가나 사회도 보수와 진보, 좌와 우의 견제와 균형 속에 돌아가는 법. 날개 꺾인 보수가 직면한 `영적 진공상태`, 반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진보 세력에 찾아든 `자만의 포만상태`. 결코 바람직한 대한민국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20년 전 외환위기 당시 대한민국 경제의 조타수를 맡았던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현 여시재 이사장)를 만나 최근 우리 사회가 직면한 고민과 활로에 대해 들어봤다. 이 전 부총리와의 인터뷰는 지난 22일 광화문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종로구 적선동 사무실에서 2시간 넘게 진행됐다.


― 6·13 지방선거는 대한민국 보수 야당에 조종(弔鐘)을 울렸습니다. 어떻게 보셨습니까.

▷이번 지방선거는 보수 세력으로부터 보수 정당이 완전히 분리된 것으로 보면 됩니다. 보수 정당이 보수 세력을 대변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반면 집권 세력으로 사람이 모이는 현상이 더불어민주당의 스펙트럼을 진보부터 보수까지 아우르도록 넓히고 있습니다. 이런 정치적 현상들이 2016년부터 진행돼 왔고 그 결과가 지난 지방선거에서 여당의 압도적 승리로 나타난 것입니다.

― 보수 정당이 보수 세력을 대변하지 못했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기득권에 안주했고, 변화를 거부했고, 공동체를 외면했습니다. 그건 이름만 보수지 수구 반동에 다름 아닙니다. 그 수구 반동의 숙주(宿主)가 2016년에 죽었습니다. 촛불혁명 이전인 그해 4월 총선에서 죽은 것입니다. 당시 총선 때 보수 정당은 `개헌선까지 당선이 가능하다`며 자만에 들떠 내부 분열을 했고, 급기야는 친박이 아닌 후보들을 대상으로 `공천 학살`까지 자행했습니다. 그리고 무참하게 깨졌습니다. 이미 그때 숙주는 궤멸한 것입니다. 보수 정당 구성원들은 오랫동안 그 숙주에 기생해오며 근근이 살아 왔던 `기생충`이었습니다. 국민은 그 기생충들에게 이번 지방선거 때 회복할 수 없는 일격을 가한 것입니다. 지금의 보수 정당은 보수 세력을 대변할 수 없고, 결국 2020년이면 없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 `숙주` `기생충`이라는 비유가 참 충격적입니다. 숙주에 대해 설명해주신다면.

▷다양한 형태의 권력에 매달려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보수 정권이 숙주였습니다. 산업화를 이끈 박정희 전 대통령 이후 전두환, 노태우를 거쳐 변화 없이 관성적으로 이어지던 수구 세력이 결국 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 시대에 `대통령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습니다. 어설픈 욕심이 가세한 것이지요. 촛불혁명은 이 같은 무개념적 관성과 허망한 욕망을 `대통령의 권력 남용과 국고 손실`로 규정지었습니다.

― 보수 정당이 죽었다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그럼 보수 세력도 궤멸된 것인가요. 보수정신은요.

▷보수 세력은 수구가 아니고 반동이 아닙니다. 보수 세력은 자연적 흐름의 변화에 따라 지켜야 할 가치를 지켜 나가면서 개선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자유와 소유권에 대한 확신으로 표현됩니다. 소박하게 이야기하면 `새마을정신`과 비슷하다고 봅니다. 새마을운동의 구호는 근면, 자조, 협동입니다. 보수는 `사지가 멀쩡하면 스스로 힘으로 열심히 살면서(근면),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자조), 돈을 좀 벌면 기부도 하고 사회와 함께 가겠다(협동)`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구 세력이 새마을운동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이 같은 좋은 뜻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졌습니다.

― 이제 진보 얘기를 해보지요. 지금은 진보 세력이 우리 사회의 완벽한 주류로 등장했습니다.

▷진보 세력은 조금 더 나은 단계를 위해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변화의 추구 이면에는 인간의 이성적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위성을 추구합니다. 가치지향적이고 목적지향적입니다.

― 보수라고 변화를 거부하는 건 아니지요. 변화의 속도와 그 결과에 대한 판단이 기준 아니겠습니까. 진보의 문제는 너무나 빠른 변화를 원하기 때문에 부작용을 간과하기 쉽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보가 취하는 정책은 목표지향적이고 하루라도 빨리 서둘러야 하니 결국은 주변을 아우르지 못하는 배타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지금의 변화가 뭔가 잘못되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의 근저에 깔려 있는 생각이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게 보수 세력이 느끼는 불안 아니겠습니까.

― 그런 불안을 느끼는 보수에게 앞으로 희망이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희망이 있다고 봅니다. 진자가 좌우로 움직일 때 한쪽으로 가속도가 붙으면 그 힘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진자가 끝으로 간 게 이번 지방선거입니다. 하지만 한쪽으로 쏠린 진자는 결국 이퀼리브리엄(균형점)을 향해 움직이려고 합니다. 지금 보수는 영적 진공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2020년이 분수령일 거라고 봅니다. 그때쯤 저는 보수 세력을 대변하는 제대로 된 보수 정당이 나타날 것으로 봅니다. 물이 낮은 데로 향해 흘러가듯, 비어 있는 보수 정당의 공간에 새로운 물(인물)이 찾아갈 것입니다. ― 보수 세력 회복이 저절로 가능할까요.

▷물론 저절로 되지는 않겠지요. 첫째, 시대변화를 충분히 읽어야 합니다. 지금은 변화의 시대입니다. 정치, 외교, 군사, 경제, 사회 모두 변하고 있습니다. 둘째, 유효한 전략, 중국 말로는 책략이 있어야 합니다. 변화의 시대에 딱 맞는 전략이어야 합니다. 셋째, 전략을 유연하고 집요하게 추진할 세력이 능력까지 갖춰야 합니다. 전략을 구체화할 멋진 전술을 가져야 합니다. 요컨대 전략과 전술을 추진할 주체적인 세력이 있고 이들 세력이 유능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게 시장의 수용성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들 세력의 전략과 전술을 맞는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존 보수 정당은 이 네 가지가 모두 없습니다.

― 그럼 진보 진영은요.

▷진보는 2016년 보수 정당이 겪었던 것과 비슷한 경험을 할 것입니다. `내부 경쟁만 이기면 된다`는 안이한 생각이 진보 정당을 약하게 만들 것입니다. 지금의 진보 정당이 그때도 지금과 같은 승리를 하느냐는 앞으로 2년간 국정운영에 달려 있겠지요. 지금의 진보 세력은 과도한 성공에 도취돼 있습니다. 일종의 자만감의 포만상태입니다. ― 말씀하신 대로 지금 진보는 `자만감의 포만상태`가 꽤 높지 않나요.

▷선거 직후 문재인 대통령이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고 걱정했습니다. 절박함을 느꼈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한 것이겠지요. 청와대와 정부에 국민들의 변화 욕구를, 다양하고 복잡하게 얽힌 욕구를 충족할 수 있도록 각자가 자기 분야에서 최선의 리더십을 발휘해 달라는 신호였습니다. 변화를 수용해 시장이 수용할 리더십을 발휘해 달라는 어찌 보면 `절규`였습니다. ― 만약 지금 진보가 자만감에 빠져 시장의 수용성 없는 정책을 추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회적·경제적 비용을 치를 겁니다. 표면에서 본다면 정치 세력은 한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하지만 밑바닥 세력, 즉 시장에는 일종의 탄성이 있습니다. 말이 안 되는 전략은 시장에서 제대로 추진되지 않을 것입니다.

대기업 비주력사 처분…상비군 쓰든 용병 쓰든 시장이 선택할 문제

― 경제 얘기로 넘어가시지요. 먼저 한국 경제에 위기가 올 것이라고 보시는지요.

▷이미 위기는 와 있습니다.

― 정치처럼 경제도 상당한 변화를 겪고 있는데 거기에 대처하지 못한 위기인가요.

▷크게 보면 그렇습니다. 과거 봉건적 농업사회의 지주-소작인 같은 수직적 상하관계가 근대 산업화 단계에도 남아 있었습니다. 산업형 공장 모델은 피라미드조직이기 때문에 상명하복, 조직동일체 원칙이란 기업 문화가 있었습니다. 오너와 회사원 관계가 수직적으로 될 수밖에 없었던 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는 수직적 관계가 수평적 관계로 바뀌었습니다. 요새 화두가 되는 플랫폼 경제이지요. 피라미드형 산업화 시대가 끝난 데다 정치적인 큰 변화도 있었는데 일부 오너들은 여전히 `내가 권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 최근 여러 문제가 터졌습니다.

― 그 변화를 수용해 문재인정부 경제정책에 소득주도성장, 혁신성장과 함께 공정경제가 들어간 것 아닙니까. 특히 최근에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재벌 오너들에게 비주력 계열사 지분을 매각하라고 얘기하는 등 속도가 빨라지고 있는데요.

▷기업들이 거버넌스(지배구조)에 대해서는 아직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많은 기업이 택하는 지주회사 모델이 정답인지 아닌지 말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미국은 수없이 많은 비즈니스 유닛이 회사라는 우산 아래에 있습니다. 그게 지주회사와 뭐가 다른가요. 기업이 살아남기 위한 정답은 결국 시장이 선택합니다.

― 지금은 국가권력이 지나치게 기업 지배구조를 간섭하는 것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비주력 기업 문제만 봐도 시스템통합(SI)과 물류가 핵심인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기업이 택하는 해법은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기업은 상비군(내부화)을, 어떤 기업은 용병(외주)을 씁니다. 그건 알아서 할 일이지요. 개인적 생각입니다만 국가의 역사를 보면 용병을 써서 전쟁에서 이긴 사례가 많지 않습니다.

― 한때는 전문화가 살길이라고 했고, 또 관련 다각화가 바람직하다고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구글이나 아마존 같은 글로벌 기업들을 보면 오히려 비주력 사업에 많은 돈을 투자하지 않나요? 일종의 비관련 다각화인데요.

▷경제적 변화를 10년 전, 20년 전 시각으로는 읽지 못합니다. 2000년대만 해도 구글 같은 데가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산업이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고, 연결돼 있습니다.
산업정책이 의미가 없습니다.

― 시대가 바뀌었는데 경제정책은 구시대적 사고의 틀에 매달려 있다는 건가요.

▷지금 정부는 `탈산업화 시대`에서 `산업화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플랫폼 시대인데 정부나 기업 모두 과거의 고루한 산업화의 웅덩이 속에 갇혀 있습니다. 마치 전쟁은 서부전선으로 옮겨붙었는데 거의 마무리된 동부전선에서 패잔병들과 싸우고 있는 격입니다.

[대담 = 손현덕 논설실장 / 정리 = 조시영 기자 / 사진 = 한주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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