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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IMF 사태가 온다? 하반기 한국경제 위기론
또다시 위기설(說)이 터졌다. 4월, 6월, 9월 잊을 만하면 위기론이 반복된다. 이번에는 아르헨티나가 진원지다. 외국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오고 페소화 가치가 급락하자 아르헨티나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다. 저 멀리 남미에서 벌어진 일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우리에게 아픈 기억이 많다. 1997년 IMF 외환위기는 태국 바트화 폭락이 원인이었지만 한국경제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촉발했다. 2008년 금융위기는 미국에서 출발했으나 한국에 미친 파장은 심각했다. 해외에서 촉발된 위기가 언제라도 한국에 전염될 수 있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게다가 한국경제가 취약하다는 점이 더욱 우려스럽다. 지난 3월 제조업 평균 가동률은 70.3%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 3월(69.9%) 이래 최저치로 떨어졌다. 그만큼 놀고 있는 공장이 많다는 뜻이다. 여기에 수출 하락세가 뚜렷하고 소득 양극화도 심해졌다. 풍부한 외환보유액, 73개월 연속 경상수지 흑자 등 펀더멘털이 탄탄하다는 의견이 있으나 위기설을 흘려들을 만한 편안한 상황이 아닌 것도 분명하다.



1등 기업 죽쑤고 외국인자금 ‘썰물’

10년 만의 최악 제조업 불황에 수출 부진…최저임금+주 52시간 쇼크 ‘脫한국’ 도미노

지난 5월 29일 오후 6시 서울 영등포구 대형 전자제품 매장. 661㎡(약 200평) 규모의 매장 가운데 TV 코너에는 30인치부터 100인치까지 TV 20대가량이 진열돼 있었다. 약 1시간 동안 이곳을 찾은 방문객은 10여명뿐. 이 매장에서 올 들어 TV가 월 100~130대가량 팔렸다. 지난해보다 15%가량 줄었다. 한 커플 고객은 ‘30% 할인’이 붙은 60인치짜리 TV를 보고 눈길만 주고는 바로 매장을 떠났다. 매장 직원은 “통상 4~5월은 혼수 시즌이라 공격적으로 마케팅을 벌였는데 올해는 오히려 매출이 줄어 당황했다. 6월 월드컵이라는 초대형 스포츠 이벤트가 있지만 특수를 누리기는커녕 오히려 판매가 줄어들까 걱정하는 지경”이라고 털어놨다.

경기 상황이 심상찮다. 내수 시장에서 경기 둔화 경고음이 곳곳에서 울리고 각종 경제지표도 불안하다. 나라 밖에서는 ‘이탈렉시트(이탈리아 유로존 탈퇴)’, 미·중 무역전쟁, 신흥국 자금 유출로 몸살을 앓고 있다. 한국경제 위기설이 솔솔 터져 나오는 이유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언급되는 위기설이지만 그냥 흘려 넘기기에 상황이 매우 좋지 않다.

위기설을 뒷받침하는 ‘숫자’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국내 업종 1위 기업 매출 감소는 불안한 한국경제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대표적인 내수 업종인 통신 1위 SK텔레콤은 1분기 매출이 2조9885억원으로 10년 만에 3조원 아래로 떨어졌다. 각종 규제와 불황으로 이동통신 매출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비용 절감으로 수익성을 보존하고 있는 형국이다.

국내 가구업계 1위 한샘 역시 올 1분기 매출이 꺾였다. 지난해 1분기 5131억원이었던 매출은 4880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한샘 매출이 줄어든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이다. 의류 기업 LF(옛 LG패션)는 1분기 매출이 3404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소폭 줄었다. 학습지 1위 대교도 지난해 대비 매출이 꺾였다. 1위 기업은 압도적인 시장 지배력으로 경기 불황 국면에서도 가장 타격을 늦게 받는다. 이런 기업들마저 매출이 줄기 시작했다는 것을 재계에서는 심상찮은 징후로 본다.

이뿐 아니다. 내수 소비 척도인 자동차와 스마트폰 판매량이 전년보다 줄었다. 올 1분기 국내 내수 시장에서 약 36만대(수입차 제외)가 팔렸다. 지난해보다 4%가량 줄었다. 스마트폰 시장도 불황에 신음하기는 마찬가지다. 서울 중구의 한 스마트폰 판매점 사장은 “100만원짜리 스마트폰을 하루 수백 대씩 팔던 시절이 꿈만 같다”고 돌아봤다.

한국경제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는 제조업도 흔들린다. 지난 3월 제조업 평균 가동률이 70.3%로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9년 3월(69.9%) 이래 최저치로 떨어졌다. 놀고 있는 공장이 그만큼 늘었다는 뜻이다. 김동연 경제부총리는 제조업 가동률 부진을 ‘일시적 현상’이라고 진단하지만 제조업이 사실상 불황 국면에 진입한 게 아니냐는 우려감이 넘친다.

지난 5월 31일 문을 닫은 한국GM 군산 공장은 국내 제조업 쇠락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곳에서는 준중형 세단인 ‘크루즈’와 소형 미니밴인 ‘올란도’를 생산했다. 하지만 지난해 크루즈와 올란도 판매량이 2013년 판매량보다 80% 급감한 3만대 수준에 그치면서 군산 공장은 결국 문을 닫게 됐다. 군산 공장의 최근 3년간 가동률은 약 20%에 불과했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일부 초우량 수출기업을 제외하면 상장기업들의 지난 1분기 이익은 오히려 뒷걸음질 쳤다는 점도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한국거래소와 한국상장회사협의회에 따르면 코스피 12월 결산법인 625개사 중 544개사 실적을 분석한 결과 1분기 매출액은 463조894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82% 증가했다. 하지만 매출액 비중(13.06%)이 높은 삼성전자를 제외하면 544개 법인의 매출액은 403조3303억원으로 전년 대비 2.89% 증가에 그친다. 영업이익과 당기순이익은 27조1604억원, 21조1452억원으로 각각 6.43%, 13.01% 감소했다.

자동차 업계 1위 현대차는 1분기 순이익이 7316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반 토막 났다. 같은 기간 한국전력도 9000억원 흑자에서 2505억원 적자로 돌아서는 등 삼성전자 쏠림화가 더욱 두드러졌다.

홍성일 한국경제연구원 경제정책팀장은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3.1%를 기록했지만 GDP 대비 민간소비(48.1%)는 1970년 이후 최저 수준이었고 가처분소득 대비 민간소비는 5년 연속 떨어졌다. 소비자 부담을 줄이기 위한 자동차 개별소비세 폐지와 신용카드 소득공제 제도 일몰 기한 연장, 물가·소득 수준 변화를 반영한 비과세 급여 확대, 국세 납부 시 신용카드 결제 수수료 폐지 등의 논의가 국회 차원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업 경쟁력이 떨어지면서 고용의 질도 좋지 않다. 취업자 수 증가 폭은 2월 이후 3개월 연속 10만명대에 머물고 있다. 취업자 수 증가 폭이 10만명대에 머문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10년 이후 8년 만이다. 실업자 수는 116만1000명으로 1월 이후 4개월 연속 100만명대를 넘어섰다. 특히 청년층의 체감 실업률은 23.4%로 여전히 20%를 웃돈다.

한국경제 위기설에 불을 붙인 것은 아르헨티나發 신흥국 금융불안이다. 아르헨티나 페소화 가치는 지난 5월 20% 가까이 하락했고 물가는 20% 넘게 상승했다. 통화가치 하락을 방어하기 위해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40%대까지 끌어올렸지만 역부족이었다.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300억달러짜리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아르헨티나의 이른바 ‘탱고 발작(Tango Tantrum)’에 주요 신흥국의 통화가치는 동반 하락세를 나타냈다. 4월 이후 러시아 루블화 가치는 10% 넘게 하락했고 브라질 헤알화도 비슷하게 추락했다. 터키, 멕시코, 인도네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통화가치도 큰 폭 하락했다. 신흥국 자금 이탈의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 금리 인상이다. 금리 인상기를 맞아 달러화 가치가 오르는 반대급부로 신흥국 통화가 약세를 보이는 것이다. 강달러 현상이 계속되면 달러화로 표시된 빚 부담이 커져 금융위기 가능성이 높아진다.



▶아르헨티나, IMF 구제금융 신청

신흥국 자금 이탈에 한국도 긴장

위기 전염 가능성 낮다는 의견도

블룸버그에 따르면 MSCI 신흥국지수에 포함된 845개 기업 부채비율은 지난해 12월 기준 100.6%로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80.1%)보다 오히려 더 높아졌다. 글로벌 신용평가사 피치는 부채 규모 상위 20개국 부채 총합이 10년 전 5조달러에서 현재 19조달러로 약 4배 가까이 급증했다고 분석했다. 여기에 이탈리아 연정 구성 무산에 따른 정치 불안 악재가 금융시장을 흔들었다. 이탈리아가 유로존을 탈퇴할 수 있다는 우려로 투자자들은 이탈리아 국채를 내던졌다.

이 같은 위기 징후에도 불구하고 전문가들은 위기가 나타날 확률을 높게 보지는 않고 있다. 매경이코노미가 대기업 임원과 교수·연구원·증권 애널리스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근소하나마 위기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쪽에 의견이 쏠렸다.

조영무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번 위기설은 미국 주택 시장 문제와 버냉키 쇼크에서 시작됐던 글로벌 금융위기, 테이퍼 탠트럼 당시와는 다르다”면서 아르헨티나의 파급력이 크지 않다고 판단했다.

한국이 위기론에서 한 걸음 벗어날 수 있는 요인은 사상 최대치를 기록한 외환보유액이다. 외환보유액은 한 국가의 대외 지급 능력을 보여주는 지표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4월 말 기준 우리나라 외환보유액은 약 3984억달러로 세계 9위 수준이다.

재정건전성도 양호한 편이다. 경상수지는 73개월째 흑자를 유지하고 있고 재정수지는 GDP 대비 1% 이상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기업 부채구조도 나쁘지 않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한국 기업 부채비율은 20년 전보다 떨어졌다. 같은 기간 브라질, 터키, 아르헨티나 등 위기설이 나오는 나라 기업 부채비율이 오른 것과 대비된다. ‘외환 마이너스 통장’으로 불리는 통화스와프 계약을 6개국과 맺고 있다는 점도 안심 요인으로 꼽힌다.

미국 금리 인상에 따른 자금 유출도 심각하지 않으리라는 전망이다. 최우진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이 미국 정책금리 등이 국내 자본 유출 규모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결과, 미국 통화당국이 정책금리를 25bp(0.25%포인트) 인상할 경우 국내 자본시장에서 빠져나가는 외국 자본 규모는 GDP 대비 0.38%에 불과했다.

양준석 가톨릭대 경제학 교수는 “한국경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쉽게 넘길 정도로 다른 신흥국과의 차별화를 이뤘다”며 “단기적인 충격은 있지만 금융위기로 번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 교수는 “위기설이 있다고 위기가 오는 것은 아니지만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명순영(팀장)·박수호·배준희·정다운·김기진 기자]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61호 (2018.05.31~06.12일자)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2018-06-08 09:02:5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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